박은관 시몬느 회장 - 백스테이지 챔피언
대중에게는 낯설지만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에는 익숙한 이름이 있다. 1987년 박은관 회장이 직원 15명과 함께 시작한 시몬느다. 창립 후 지난 40여 년 동안 시몬느는 다양한 명품 핸드백의 디자인 개발부터 소재와 패턴 설계, 생산과 품질관리까지 제품 제조의 전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유럽 밖에서는 럭셔리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넘어, 오늘날 세계적인 브랜드들이 가장 먼저 찾는 ‘제조업자 개발생산(ODM)’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명품 산업은 오랫동안 유럽의 장인정신과 제조 전통을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파리와 밀라노, 피렌체처럼 장인 문화가 축적된 도시는 럭셔리의 본고장이자 품질을 보증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을 만들었는지만큼 어디에서 만들었는지가 중요했고, 유럽 밖에서 생산된 제품은 명품이 되기 어렵다는 인식도 견고했다.그러나 핸드백 하나가 완성되는 과정은 산지의 명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디자이너가 그린 선 하나를 실제 제품으로 구현하려면 적합한 가죽과 부자재를 찾고, 패턴을 설계하며, 수차례 샘플을 만들고 수정해야 한다. 가죽의 두께와 탄성, 장식의 무게, 봉제선의 간격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차이가 제품의 형태와 내구성, 손에 닿는 감각까지 좌우한다.완성도 높은 제품을 한두 개 만드는 것과 수천, 수만 개를 같은 품질로 생산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다. 장인의 감각에 머물던 기술을 일정한 공정과 기준으로 바꾸고, 어느 생산 거점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오도록 시스템화하는 한편, 새로운 소재나 복잡한 디자인에도 생산 가능한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럭셔리 브랜드가 협력사를 쉽사리 바꾸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디자인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제품의 명성을 잇기에 충분치 않다. 브랜드가 수십 년 동안 지켜온 기준을 이해하고,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 끝까지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제품에 브랜드의 이름이 새겨지는 순간, 그 이름의 완성도에 대한 책임도 함께 나누게 된다.한국에서 출발한 시몬느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주문받은 제품을 생산하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넘어 소재와 디자인 개발, 패턴 설계와 샘플 제작, 생산과 품질관리까지 함께 맡는 제조업자 개발생산(ODM)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에서 시작한 생산 기반은 중국을 거쳐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으로 확대됐고, 개별 공장을 넘어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의 제품 개발과 생산을 연결하는 체계를 구축했다.시몬느의 성장은 여느 제조기업의 성공 방정식과는 사뭇 다르다. 명품의 가치가 특정 지역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한국 기업도 세계적인 브랜드의 기준을 함께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여정에 가깝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느냐보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완성도를 책임지느냐다. 시몬느가 지난 40여 년 동안 답해온 질문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브랜드가 먼저 찾는 회사“그런데 왜 우리와 30년 넘게 거래한 겁니까?”지난 2018년, 창립 31주년을 맞아 뉴욕에서 오랫동안 거래해온 바이어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자리였다. 그해 박은관 회장은 포브스가 선정한 한국 부호 순위에서 36위에 올랐다. 박 회장이 던진 질문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이 웃으며 답했다.“시몬느와 거래하면 마음이 놓입니다.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으니까요.”시몬느와 처음 거래한 브랜드는 DKNY였다. 발주량은 120개였지만 박 회장은 200개를 생산했다. 품질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제품까지 고려해 여유분을 만든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기준을 통과한 제품만 브랜드에 납품했다. “시몬느는 마음이 놓인다.” 박 회장에게 이 말은 지금까지 시몬느가 시장에서 쌓아온 신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뛰어난 기술이나 가격경쟁력도 중요하지만, 문제가 생겨도 결국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 약속한 품질과 납기를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지금의 성과를 만들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럭셔리 업계에서 신뢰라는 자산은 단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를 적용하면서도 품질을 유지해야 하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브랜드보다 먼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박 회장은 오랜 파트너십의 조건을 세 단어로 설명했다. 일관성(Consistency), 지속성(Continuity), 예측 가능성(Predictability)이다. 언제 맡겨도 같은 결과를 만들고, 환경이 달라져도 관계를 이어가며,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브랜드가 협력사를 선택할 때 품질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회사가 다음에도 같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 끝까지 해결할 수 있는지가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시몬느는 코치를 비롯해 마이클 코어스, 토리 버치, 마크 제이콥스, 폴로 등 여러 글로벌 브랜드와 오랜 기간 협업해왔다. DKNY는 38년째, 폴로는 37년째, 토리 버치는 20년 넘게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마이클 코어스와 마크 제이콥스는 브랜드가 시작할 때부터 함께했다. 브랜드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협업은 끊기지 않았다. 이런 배경에는 시몬느만의 축적된 개발 데이터와 아카이브가 있었다. 1993년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30여 년간 박 회장과 함께한 이선용 시몬느액세서리컬렉션 사장은 “뉴욕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박 회장은 바이어들과 나눈 이야기를 하나하나 정리한다”며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회상했다.- 공장이 아닌 플랫폼“좋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많습니다. 품질은 기본이에요. 이제 브랜드가 원하는 것은 생산을 넘어선 역량입니다.”박 회장이 추구하는 제조의 본질은 브랜드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소재를 찾고 디자인을 제안하며, 패턴과 샘플을 개발해 실제 생산으로 연결하는 과정 전체를 포함한다. 완성된 도면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답이 없는 문제를 브랜드와 함께 풀어가는 일이다.이 같은 방식은 시몬느가 저가 제품 생산에서 고급 핸드백 제조로 방향을 바꾸던 시기에 구체화됐다. 박 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한국 제조업에 부족한 것이 손기술이나 생산기술보다 소재와 디자인이라고 판단했다. 이탈리아 산타크로체의 가죽공장(테너리)들을 찾아다니며 가죽의 종류와 특성, 가공 방식과 품질을 직접 살폈고, 현지에서 확보한 좋은 소재에 한국 장인들의 손기술과 제조 역량을 결합하는 방법을 모색했다.그 무렵 피렌체에서 만난 한 현지 가죽산업 관계자의 조언은 그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럭셔리 핸드백 시장은 계속 성장하는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젊은 장인이 줄어들고 있었다. 좋은 소재를 이해하면서도 숙련된 손기술과 생산 역량을 갖춘 새로운 제조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박 회장은 훗날 이 말을 ‘원 빌리언 어드바이스(One Billion Advice)’라고 불렀다. 수십억원 넘는 가치를 지닌 조언이었다는 뜻이다. 이탈리아의 소재와 한국 장인들의 기술을 결합하면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럭셔리 핸드백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는 시몬느가 고급 핸드백 제조로 방향을 전환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많은 분이 시몬느를 공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공장에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OEM만으로는 오래갈 수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디자인 조직을 만들고 소재를 연구하고 패턴을 축적했습니다. 브랜드가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면 우리도 함께 기획하고 새로운 소재를 제안하고 샘플을 개발합니다. 저는 지금도 시몬느를 공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풀 서비스 컴퍼니(Full Service Company)입니다.”박 회장이 추구하는 풀 서비스 컴퍼니는 디자인과 개발, 생산을 서로 분리하지 않는 구조다. 디자인 단계에서 생산 가능성을 함께 검토하고, 생산 과정에서 발견한 문제는 다시 개발에 반영한다. 브랜드가 원하는 디자인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형태와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간다.일반적인 제조업체가 하나의 브랜드를 위한 생산체계를 운영하는 것과 달리 시몬느는 서로 경쟁하는 글로벌 브랜드의 제품을 하나의 개발·생산 체계 안에서 관리한다. 브랜드마다 소재와 패턴, 샘플과 개발 정보를 철저히 분리하면서도 축적된 개발 역량과 제조 노하우를 바탕으로 각 브랜드에 가장 적합한 해법을 제시한다. 품질뿐 아니라 보안과 독점성까지 함께 지켜온 것이 시몬느가 오랜 기간 신뢰를 이어온 이유다. 박 회장은 시몬느의 위치를 ‘백스테이지 챔피언(Backstage Champion)’에 비유했다. 무대 뒤에서 공연을 완성하는 사람들처럼 브랜드가 역량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는 의미다.“브랜드가 아니라 제조를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향수 냄새가 나는 재킷보다 기름 냄새가 나는 재킷이 더 편합니다.”웃으며 건넨 말이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이름보다 브랜드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제조에 더 큰 가치를 두는 박 회장의 철학이 담겨 있다.ODM도 같은 의미라고 설명했다.“브랜드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생산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해주는 파트너를 원합니다. 소재를 구해달라고 하면 소재를 찾고, 디자인을 연구하면 함께 고민하고, 생산이 어렵다면 새로운 공정을 개발합니다. 그게 ODM입니다. 시몬느는 제조회사라기보다 브랜드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회사라고 생각합니다.”브랜드의 문제를 해결하며 축적해온 경험은 장인의 감각에 의존하던 제조를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바꿔갔다. 소재 선정부터 개발, 생산, 품질관리까지 축적된 기준은 훗날 시몬느의 표준 프로세스인 ‘SIMONE WAY’로 체계화됐다. 개인의 경험이 조직의 시스템으로 축적되면서 시몬느는 어느 생산 거점에서도 같은 품질을 구현할 수 있는 제조 플랫폼으로 발전했다.제품 개발이 이뤄지는 시몬느 개발실. 장인들이 다양한 소재와 공정을 검토하며 샘플을 제작하고 제품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공간이다.- 제조의 국적을 지우다세계적인 브랜드의 신뢰는 한 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만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어느 공장에서 생산하든 누가 만들든 같은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 생산지가 늘어날수록 장인의 경험은 시스템으로 축적돼야 하고, 사람의 손끝에 의존하던 기술은 표준이 돼야 한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폭증하는 주문을 국내에서만 소화하기 어려워졌다. 박 회장은 1992년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기는 결단을 내렸다. 이때도 새로운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어렵게 인정받은 ‘메이드 인 코리아’를 넘어 ‘메이드 인 차이나’의 품질을 다시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제조기업의 품질 기준이 생산 국가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는 건 제조업계에서 불문율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의 제조 역량, 특히 럭셔리 브랜드 제조 역량은 한참 부족하다는 인식과 우려가 컸다. 현재 시몬느는 3개국 6개 공장에서 약 2만 명이 근무하는 글로벌 생산체제를 운영한다. 올해 연 매출은 약 7500억원 규모다. 규모가 커질수록 박 회장에게 중요해진 것은 장인의 기술을 특정 개인의 감각에 머물게 하지 않는 일이었다. 생산 거점이 늘어날수록 시몬느는 미싱과 접착, 접기 등 장인들의 손끝에 의존하던 공정을 하나씩 표준화했다. 이렇게 축적된 제조 기준은 어느 공장에서 누가 만들더라도 같은 품질을 구현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박 회장은 이런 시스템 역시 사람에게서 시작됐다고 말했다.“시몬느가 잘됐다며 창업자인 제 이야기만 하는데, 절반은 우리 장인들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사가 성장할 때마다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어준 사람들이 바로 현장에서 일하는 장인들이었습니다.”제조 시스템의 경쟁력은 LVMH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세계시장에서도 확인됐다. 1999년 LVMH의 장 폴 비비어 사장은 계열사 대표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테이블 위에는 이탈리아에서 만든 핸드백 다섯 개와 시몬느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 핸드백 다섯 개가 놓였다. 모든 라벨을 떼어낸 뒤 그는 대표들에게 ‘메이드 인 이탈리아’를 골라보라고 했다. 대표들이 이탈리아산이라고 고른 제품 가운데 세 개는 시몬느가 만든 가방이었다. 박 회장은 그 순간을 시몬느의 제조 역량에 대해 가장 큰 자신감을 얻은 때로 기억한다. 생산국이라는 명성보다 제조 역량이 명품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명품의 가치는 더는 생산지의 이름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누가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을 얼마나 흔들림 없이 구현해내느냐다. 시몬느는 지난 40여 년 동안 이를 증명해왔다.- 기반을 만드는 사람박은관 회장이 평생 쌓아온 것은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제조 역량과 기반이었다. 이런 철학은 이제 문학과 예술, 언어를 다음 세대로 잇는 토대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제조와 문화는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그 출발점에는 새로운 것을 직접 보고 배우려는 호기심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 놓여 있다.박 회장의 아버지는 인천에서 원양어업과 연근해 수산업에 종사한 사업가였다. 어선뿐 아니라 어망공장과 냉동공장, 조선소까지 운영했다. 형들이 대학을 졸업한 뒤 가업에 합류한 것과 달리 그는 곧바로 아버지 회사로 들어가지 않았다. 먼저 바깥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부친에게는 “3년만 사회생활을 배우고 해외를 돌아본 뒤 돌아오겠다”고 말했다.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그가 선택한 방법은 무역회사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꿈꿨던 뉴욕과 피렌체, 파리에 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당시 회사가 다루던 품목 가운데 하나가 핸드백이었다. 처음부터 패션이나 핸드백 사업을 목표로 삼았던 건 물론 아니다. 세상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열망에 가득 차 있던 청년이 우연히 마주한 상품이 바로 핸드백이었다.입사 6개월 만에 처음 찾은 해외 출장지는 이탈리아 피렌체였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도시였다. 함께 출장 온 부장에게 방을 같이 쓰자고 제안해 숙박비를 아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셔츠 열 장을 샀다. 피렌체 사람들이 보여준 새로운 미감과 생활 방식을 직접 경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연세-박은관문학상 제정 과정부터 함께해온 곽효환 경남대학교 교수는 이를 박 회장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일화로 꼽았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경험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호기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라는 설명이다. 독일 문학을 공부했고, 디자인을 전공하지도, 패션에 특별한 관심을 두지도 않았던 그가 럭셔리 산업의 한복판으로 들어간 동력도 그러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당초에는 몇 년간 경험을 쌓은 뒤 가업을 잇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핸드백의 생산과 수출, 해외 바이어와 시장을 직접 경험할수록 이 산업이 주는 매력과 가능성이 눈에 들어왔다.“제가 조금 더 노력하고 감각을 발휘해서 새로운 소재를 찾고 디자인을 개발하면, 6개월이나 9개월 뒤 뉴욕이나 파리에서 사람들이 제가 만든 가방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박 회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여러 차례 “재미있었다”고 회고했다. 자신이 찾아낸 소재와 디자인이 제품으로 완성되고, 세계적인 도시의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즐거웠다.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선택한 일이 어느새 평생 이어온 업이 됐다. 그가 “핸드백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고 말하는 이유다.시몬느가 개발·생산한 다양한 브랜드의 핸드백 아카이브. 축적된 제품은 연구와 개발의 출발점이자 다음 제품을 위한 기준이 된다.문화와 예술을 향한 관심도 출장길에서 시작됐다. 1990년대 초 런던 출장 중 갑작스러운 폭설로 공항이 이틀간 폐쇄되자, 호텔 주변을 걷다가 우연히 한 갤러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베니스를 그린 수채화 전시를 보고 작품 두 점을 샀다. 난생처음 구입한 그림이었다. 이후 파리와 피렌체, 밀라노, 뉴욕을 오가며 럭셔리 브랜드가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디자인과 미술, 건축, 음악, 공간을 통해 고유한 문화를 축적한다는 사실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이런 경험은 기업과 문화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졌다.“문화라는 것은 기업의 외형을 꾸미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기업의 깊이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현재 인천 송도에서는 박 회장이 주도하는 핸드백박물관이 조성되고 있다. 오랫동안 쌓아온 아카이브와 장인의 기술, 핸드백 산업의 역사와 문화를 제품 너머의 형태로 남기기 위해서다. 제조업이 하나의 문화와 콘텐트를 축적하는 산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문화를 남기려는 시도는 박물관에만 머물지 않았다. 문학과 번역, 기록을 남기는 일처럼 문화의 토대를 다지는 일에도 오랜 시간 힘을 쏟았다. 시몬느 번역상,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콩코디아 언어마을에 한국어마을 설립 후원, 윤동주기념관 조성, 핸드백 용어사전 편찬 등 박 회장의 문화적 관심은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됐다.박 회장이 특히 의미 있게 꼽는 작업은 핸드백 용어사전이다. 베트남 공장에서 한국 장인들이 일본식 현장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느는 연세대학교 교수진과 함께 현장에서 쓰는 일본식 용어를 2년 4개월에 걸쳐 우리말로 정리하고, 이를 영어·중국어·베트남어·인도네시아어·캄보디아어로 번역해 산업현장에 보급했다.“제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말을 제대로 남겼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습니다.”2023년 제정한 연세-박은관문학상은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한국 문학이 세계적으로 더 널리 읽히려면 좋은 작품뿐 아니라 번역과 해외 출판을 뒷받침할 기반이 필요하다고 봤다. 작품 발굴부터 번역, 해외 출판까지 함께 지원하도록 설계한 것도 그 때문이다.곽 교수는 박 회장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로 ‘펀더멘털(Fundamental)’을 꼽는다. 문화예술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와 기반이며, 문학이 단단해야 예술과 문화도 오래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의 문화 활동 전반을 관통한다는 설명이다.결실은 2025년 세종문화상 대통령 표창으로 이어졌다. 우리말과 한국어 문화 확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다. 윤동주기념관 후원 역시 산업과 문화를 함께 기록하고 남기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제품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수 있지만, 기록과 문화는 남는다”는 그의 말처럼 제조의 성과 역시 숫자로 남아 있다. 1987년 창업 이후 시몬느가 생산한 핸드백은 약 4억 개에 이른다. 리테일 가치로 환산하면 100조원, 공장 출고(FOB) 기준으로도 15조원 규모다.이제 그는 성과를 넘어 다음 세대가 이어갈 기반을 만드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박은관문화재단을 통해 문학과 번역, 한국어와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더욱 체계적으로 이어가며, 자신이 물러난 뒤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가고 있다.기록과 문화를 남기는 일도 결국 제조를 다음 세대로 잇기 위한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박 회장의 시선은 여전히 제조를 향한다. 그는 “은퇴하는 날까지 제조업자로 남겠다”고 말했다. 다만 회사의 외형을 키우기보다 오랜 시간 쌓아온 전통과 정체성, 장인의 기술을 다음 세대에 온전히 잇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시몬느가 앞으로도 세계 최고의 제조 경쟁력을 유지하며 장인과 디자이너를 키우는 플랫폼으로 남는 게 그의 바람이다.시몬느 개발실에는 정년이 없다. 사무직은 정년이 있지만, 숙련된 장인은 스스로 일을 이어갈 수 있을 때까지 현장을 지킨다. 현재 60세 이상 장인이 21명, 최고령 장인은 74세다. 매년 대졸자 5명을 장인 과정으로 선발해 기술과 경험을 전수한다. 제조 경쟁력은 결국 사람에게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좋은 장인을 키우고, 제조 경쟁력을 다음 세대로 잇는 일은 박 회장이 그리고 시몬느가 꿈꾸는 다음 40년이다.